한 때 전 세계 기축통화로 군림했던 영국 파운드화 가치 사상 최저치로 추락했다. 이는 ‘파운드화 쇼크’가 되어 아시아와 유럽에 이어 미국 뉴욕 증시까지 덮치며 글로벌 금융시장이 흔들리고 있다. 영국 통화 가치 하락으로 부채 상환에 차질이 생기며 ‘영국발(發) 금융위기’가 터질 수 있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달러 가치의 초강세를 뜻하는 ‘킹 달러’ 현상으로 다른 국가들의 통화 가치가 줄줄이 하락해 세계 무역이 위축될 것이란 공포와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발 경기 침체 우려까지 겹쳤다.
英,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26일(이하 현지 시간) 영국 파운드화의 미 달러 대비 환율은 약 5% 떨어지며 한때 사상 최저 수준인 1.03달러로 추락했다가 27일 상승하며 진정됐다. 이전 최저치는 1985년 2월 26일의 1.05달러였다. 파운드화 가치 급락에 불안감이 확산되며 26일 영국의 5년 만기 국채 금리는 연 4.603%로 세계 금융위기 때였던 2008년 9월 이후 최고치로 치솟았다.
이날 미국 증시 3대 지수도 ‘파운드화 쇼크’로 일제히 하락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는 전장보다 1.03% 하락해 연중 최저치를 경신했다. 다우지수는 전고점 대비 20% 이상 하락해 약세장(베어마켓)에 진입했다.
26일 연중 최저점으로 추락했던 국내 증시는 27일에도 출렁였다. 27일 코스피는 장중 2,197.9까지 밀렸다. 지수가 장중 2,200선 밑으로 떨어진 건 2020년 7월 24일(2,195.49) 이후 2년 2개월 만에 처음이다. 이후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0.13%(2.92포인트) 오른 2,223.86에 마감했다. 전날 700 선이 무너졌던 코스닥지수는 0.83%(5.74포인트) 반등하며 698.11로 거래를 마쳤다. 원-달러 환율은 9.8원 내린 1421.5원에 마감했다.
파운드화의 몰락 오나?
미국 증시와 함께 미 국채 금리, 국제 원자재 값도 연일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강력한 금리 인상 기조로 26일(현지 시간)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장중 3.9%를 넘어 2010년 이후 12년 만에 가장 높았다. 뉴욕상품거래소의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배럴당 76.7달러로 9개월 만에 최저치를 찍으며 경기 침체 우려를 키웠다.
아시아, 유럽에 이어 미국까지 글로벌 금융시장이 연쇄적으로 흔들린 데는 영국 파운드화 가치 폭락이 기폭제가 된 것으로 분석된다. 파운드화 가치가 ‘1달러’ 아래로 추락할 것으로 예상되며 파운드화를 거래하는 외국 기업들까지 타격을 받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영국 정부는 재원 부족분 마련을 위해 향후 국채도 추가로 계속 찍어낼 전망인데, 파운드화마저 폭락하니 영국 정부의 부채 상환능력까지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이다.
파운드화 폭락의 이유
영국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내·외부 요인이 공존한다. 외부 요인으로는 미국이 40년 만의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잡으려 연이어 금리를 인상하는 강도 높은 긴축 정책을 펴고 있는 점이 꼽힌다. 그로 인해 파운드화를 포함해 전 세계 대부분의 통화 가치가 동반 하락하는 중이다. 주요 6개 통화에 대한 달러의 가치를 보여주는 지표인 달러인덱스는 26일 114선을 돌파하면서 20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하지만 최근 파운드화 가치 하락에 기름을 부은 것은 영국 정부다. 트러스 총리는 23일 2023년 4월 예정했던 법인세 인상(19%→25%) 인상 계획을 철회하고, 국민보험을 내리는 것을 뼈대로 한 새 예산안을 발표했다.
트러스 총리가 경선 시기 중에 내놓은 안을 보면 연간 300억파운드(약 46조1000억원) 정도의 감세가 이뤄질 것으로 예측됐지만, 소득세 인하 등이 추가되며 감세 규모가 커졌다. 그로 인해 정책 효과가 모두 드러나는 2026년엔 전체 감세 규모가 연간 450억파운드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해 올겨울 난방비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일반 가정·기업에 에너지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6개월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600억파운드가 든다. 이런 내용을 모두 합치면, 1972년 이후 50년 만의 최대 감세정책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시장은 이를 파운드화 가치 급락을 예고하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정부가 재원을 마련하려면, 국채를 발행하거나 세금을 인상해야 한다. 세금을 내리니 기댈 곳은 빚밖에 없다. 영국 정부는 2022년 국채 발행액을 애초보다 50% 늘어난 624억파운드로 늘이겠다고 했다. 감세를 통한 경제 활성화가 아니라 국가부채 급증으로 인한 재정건전성 우려만 부채질한 셈이다.
실제 국제통화기금(IMF)은 국내총생산의 80% 수준이던 영국의 국가부채가 2020년 이미 104%로 늘었다고 밝혔다.
영국 자산운용사 야누스 헨더슨의 글로벌 채권 포트폴리오 매니저 베사니 페인은 <로이터> 통신에 “정부 의제에서 비롯된 변화로 효과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생각한다”며 “경제에 대한 전망 없이 이러한 정책을 내놓은 것은 무책임하다”라고 평가했다.
英, IMF 구제금융을 받을지도 모른다?!
물가가 40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는데도 시장에 사실상 돈을 푸는 감세 정책이 나오자 투자자들은 불안감에 휩싸여 파운드화를 투매 중인 상황이다.
영국 파운드화의 미 달러 대비 환율은 26일 1.09달러까지 오르면서 반등을 꾀했으나 영국 중앙은행(BOE)이 긴급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것이란 시장의 예상을 깨고 인상 결정을 유예하자 다시 하락하는 등 급등락 하며 이날 한때 사상 최저인 1.03달러까지 추락했다. 이는 역대 최저치였던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시절인 1985년 수준보다 낮다. 금융시장 불안에 주택담보대출 기관인 할리팍스 등은 일부 상품 판매를 일시 중단했다.
파운드화 가치는 27일 상승세로 시작하며 진정되는 듯했지만 장기적으로 가치가 더 하락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영국 정부의 ‘완전히 무책임한’ (감세) 계획이 파운드화 가치를 1달러 아래로는 물론이고 1유로 아래로도 끌어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했던 누리엘 루비니 전 뉴욕대 교수는 24일 트위터에 “영국은 스태그플레이션이 찾아와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구걸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운드화 급락 쇼크 여파는 영국뿐 아니라 세계를 흔들고 있다. 영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은 영국에서 벌어들인 돈을 본국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파운드화 가치 하락에 대한 손실이 불가피하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26일 칼럼을 통해 “영국이 (만성 부채 국가인) 이탈리아를 대신해 새로운 유럽의 경제 문제 국가로 부상했다”라고 평했다. 라파엘 보스틱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파운드화 폭락을 초래한 영국 정부의 감세 정책으로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고 글로벌 경기침체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경고했다.
세계경제, 악재가 겹치고 겹친다
파운드화 급락이 달러 초강세를 뜻하는 ‘킹 달러’ 현상을 더욱 부추기면서 이로 인한 무역 위축 공포도 시장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6개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지수는 114를 돌파해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킹 달러’는 신흥국의 금융위기 우려는 물론이고 미국 내에서도 경기 둔화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달러화 가치 상승으로 해외에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 미국 수출 기업 실적이 부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 투자기관 네드 데이비스 리서치는 글로벌 경기침체 확률이 98%까지 상승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태를 통해 영국 경제가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이 크게 떨어져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인플레 억제를 위해 금리는 인상하는데, 감세로 시중에 돈은 풀려고 하는 그야말로 엇박자 정책이다. 지금처럼 인플레가 굉장히 강하고 시장이 민감한 상황에선 어설픈 정책만으로 엄청난 실을 부를 수 있단 걸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
게다가 EU 탈퇴 이후 영국은 글로벌 금융 중심지로서의 위상이 약화됐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GDP는 9.8% 하락, GDP 대비 정부 부채는 95.9% 급등하는 등 팬데믹 타격도 상대적으로 많이 받았다. 올해는 7월 소비자 물가 지수가 전년보다 10% 급등하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영국 경제의 기초 체력 자체가 크게 약화 중이었던 것인데 감세 정책이 하나의 트리거가 돼 누적된 문제를 한 번에 드러낸 것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영국 정부로서도 경기 침체 우려와 인플레 억제 중 후자에 초점을 맞춰 총력을 쏟아부어야 할 때다.
많은 사람들에게 여왕의 죽음은
영국 소프트 파워의 종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파운드화 가치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것은
다차원적으로 봤을 때 이런 징표로 볼 수 있다
- 英 옥스퍼드 대학 이언 골딘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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